사람공부/심리학

[미움받을 용기2]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 라는 핑계

Student9725 2019. 10. 5. 02:55

프로이트, 융, 아들러는 모두 반증 가능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은 아니다.

 

아들러는 철학으로 봐야 한다.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한다. 종교는 신이 세계를 설명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을 동원한다. 철학은 인생을 사는 태도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관점에서, 자아와 다른사람과 세계를 고려한다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에는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타인의 기대를 내가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것은 단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아들러는 카운슬링을 치료가 아닌 '재교육'이라고 본다. 교육의 목적은 우월성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것이다. 교육은 아이의 과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이다.

 

신호등의 빨간불과 파란불을 구분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다른사람과 사회가 있기 떄문에 배워야 할 지혜가 있다. 아들러는 이것을 '인간 이해'라고 부른다. 인간 이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자신이 있을 곳을 찾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자립은 존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리히 프롬의 말에 따르면,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 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즉,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 줌으로써, 용기를 주는 것이다.

 

존경은 '공동체 감각'에서 생긴다. 공동체 감각이란 social interest,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같은 말이다. '그 사람 답게'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는 말은 존엄을 지켜준다는 말과 같다. 타인의 관심사에 귀울인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에 필요한 것이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같은 마음이고 같은 인생을 산다면 어떨까? 반드시 나도 이 사람과 같은 과제에 직면하겠지. 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겠지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감이다.

 

잘 안될 수 있다. 이 때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타인의 말과 행동을 판단할 때는 거기에 숨어 있는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사건에 의미부여하는 것에 따라 결정 된다. 지금, 여기의 '나'가 언제나 자아를 결정한다. 지금이 과거를 결정하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 목적에 반하는 사건은 지워버린다.

 

왜 어떤 사람은 과거의 비극을 교훈이나 기억으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현재까지 트라우마로 갖고 있는 걸까? 그 과거를 스스로 필요로 하기 떄문이다. 많은 사람은 '나쁜 그 사람' 또는 '불쌍한 나'의 이야기를 내내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다.